우리 가족이 세종시로 내려가게 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그 무렵 우리 교회에는 S라는 청년이 있었다. 개척 초기부터 함께했던 자매였는데, 역시 교회 초창기 멤버였던 남자청년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S의 부모님은 S가 결혼하기 약 1년전쯤 고향인 목포를 떠나 병점으로 이사를 오셨고, 자연스럽게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S는 원래 친구들과 자취를 하다가, 부모님이 이사 온 후에는 함께 살게 되었다. 나는 처음엔 "이제 안정적인 가정 안에서 지낼 수 있겠구나" 싶어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정에 깊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겉보기엔 신실한 안수집사 가정이었고, 자매도 부모님과 곧잘 어울려 다녀 사이가 좋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사실 그 아버지는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성향이 강했고, 어릴 적부터 자매에게 많은 것을 강요했던 사람이었다. 자매는 그런 기대에 맞춰 반듯하게 자라긴 했지만, 내면에는 깊은 상처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자매는 결혼을 통해 하루라도 빨리 그 집을 떠나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교회에서 나름 적응을 잘 해가며, 경험을 바탕으로 교회 운영에 여러 조언도 해주셨다. 많은 부분이 변화되는 듯도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 교회에서도 안수집사와 장로를 세우는 일이 있었는데, 남편은 그분을 장로로 세웠다. 다른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오랜 시간 섬겨온 분이기도 해서, 순서대로라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S가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직장이 세종시로 발령이 나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이 생겼다. 새 보금자리를 알아보러 갈 때, S의 아버지와 우리 남편이 함께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편은 깜짝 놀랄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세종시는 도시가 조성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도시가 살아날지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집값이 매우 낮았다. (아니 집값은 비쌌지만, 전세와 월세값이 터무니없이 쌌다.) 놀랍게도 30평이 넘는 아파트가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인 곳도 있었다. 게다가 도시 전체가 계획적으로 조성돼 있어 정비가 잘 되어 있었고, 공기도 좋았다.
다녀온 남편은 흥분된 목소리로 나에게 이야기했다.
“세종에 30평대 아파트 월세가 얼마인지 알아?”
“글쎄... 한 70만 원쯤?”
“아니, 25만 원. 보증금 3,000에.”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아파트 월세가 이곳 원룸 가격보다 싸다고?
남편은 조심스럽게 나를 떠보듯 물었다.
“우리... 이사 갈까?”
“그래, 가자. 나도 이제는 너무 힘들어... 그런데 교회는 어쩌지?”
예전 같았으면 교회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상상도 못할 말이었다. 당시 교회는 70명이 넘는 성도들이 모이며 부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나는 병점에서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넷째를 임신해서 입덧도 하고 있었다. 남편도 내가 흔쾌히 “가자”고 하자 놀란 눈치였다. 그냥 던져본 말이었는데, 내가 진심으로 수긍하니 오히려 마음이 움직인 듯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진지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시작했다. 당장 보증금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교회에서 지원을 해줄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할수록 ‘떠나야 한다’는 마음이 점점 확고해졌다.
기도할 수록 마음에 정리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 가정이 이곳에 있으면 당장 교회는 괜찮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가정은 결국 무너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무엇보다 내가 이미 많이 무너져 있었다. 남편의 건강 역시도 문제가 온지 몇 년은 되었다. 게다가 아이들도 교회에서 좀 떠나있는게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당시 은진이가 일곱 살이었는데,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은진이와 기쁨이를 비교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은 큰 악의가 담긴 건 아니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이 아이들이 이곳에서, 어른들의 생각없는 말들 속에서 한창 자라나는 이때 쓸데없는 상처를 받을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다. 중보기도를 함께 하던 지체들 역시 “내려가는 게 좋겠다”는 마음을 받았다. 반면 교회 장년 성도들은 우리가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교회가 막 부흥하려는 시점에 목회자 가정이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셨다. 하지만 당시 우리 둘 다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교회가 뭔가를 해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가 떠나는 것을 잡을 수는 없었다.
보증금은 근식이와 집을 합치는 방식으로 마련했다. 그 시기 근식이도 질병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근식이 역시 병점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근식이네 원룸 전세보증금을 아파트 보증금으로 돌리고, 그 외의 생활비와 관리비는 우리가 부담하기로 했다. 물론 그 돈은 부모님의 것이었기 때문에 허락을 구했고, 감사하게도 부모님께서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그렇게 우리 가족과 근식이, 새로운 삶을 향해 함께 세종으로 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