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부대교회
김지혜 사모 간증 연재중

세종에서의 날들, 감사한 기억들

2025년 5월 14일 · 김지혜


세종에서의 새 삶과 공동체

세종으로 이사 온 후, 모든 것이 새로웠다. 넓은 아파트, 깨끗한 공기, 그리고 아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교회에서 예배를 못 드린다는 것. 병점에서 다니던 교회 예배에 매주 올라가는 것이 점차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넷째를 임신한 나는 달수가 지날수록 체력적으로 버거웠고, 함께 세종으로 내려온 지체들도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는 주일마다 각 가정에서 돌아가며 모여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종 새부대교회’라는 작은 커뮤니티가 태어났다. 온라인 예배는 병점에서의 기름부으심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서로를 돌아보며 위로와 힘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모두 세종에서의 삶에 만족했고, 병점에서 지체들이 내려와 교제하거나 새로운 이들이 합류하면서 커뮤니티는 조금씩 자라났다.

 

근식이 결혼과 가희의 탄생

동생 근식이가 결혼을 준비하던 때였다. 근식이는 보람이와 결혼을 앞두고 우리랑 같은 아파트에 신혼집을 마련해 두고 거기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나는 막달에 접어들어 출산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남편은 병점에 있을때가 많았기 때문에 혹시라도 혼자 병원에 가야 되는 상황이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언니와 동생이 근처에 있어 대비책을 세워놓았다. 밤에 진통이 오면 언니가 아이들을 돌보고, 근식이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근식이 결혼식 전날 저녁, 진통이 시작되었다. 근식이는 다음 날 새신랑이 될 터라 일찍 쉬어야 했지만, 나 때문에 밤에 병원에 가야했다. 언니는 약속대로 얼른 와서 아이들과 함께 잠을 잤다. 그때가 밤 10시쯤정도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남편에게 급히 연락을 했다. 남편은 병점에서 부랴부랴 내려왔다. 병원에서 근식이가 보호자 역할을 하며 곁에 있어주었지만, 남편이 오기 전까지는 마음이 영 불안했다. 남편이 도착하자 나는 크게 안도를 했고, 그 기색을 눈치챈 근식이는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난 역시 누나한테 별 도움이 안된다면서 ㅋㅋ)

 

그리고 밤새 진통 끝에 다음 날 아침, 우리 가희가 태어났다. 그래서 가희의 생일이 근식이의 결혼기념일이다. 덕분에 근식이네 결혼기념일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이 일을 겪으며 형제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어렸을 때는 네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 때문에 늘 남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투덜댔다. 하지만 자라면서, 어려운 순간마다 서로를 위해 달려오는 힘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는 말씀은 내 삶에서 진리로 다가왔다.

 

넷째 육아와 건강의 도전

세명을 키우는 것과 네 명을 키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고만고만한 나이의 아이들 넷을 돌보며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집안일은 끝없이 쌓였다. 체력은 하루가 다르게 소진되었다. 원래도 건강이 튼튼한 편이 아니었는데, 이 시기에는 심장에 무리가 오는 게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며칠에 한 번씩은, 저녁 7시쯤가 되면 심장이 조이는 듯한 느낌에 꼼짝할 수 없었다. 저녁까지 먹이고 나면 퍼지는 거였다. 아이들에게는 “엄마는 이 시간에 잠시 쉬어야 해”라고 양해를 구하고 침대에 누워 숨을 고르곤 했다.

 

어느 날은 집안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너무 지쳐 울고 싶었다. 남편이 집에 없을 때가 많아서 더 그런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티 내고 싶지 않아 가희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가, 유모차를 끌며 조용히 울었다. 그만큼 몸과 마음이 한계에 다다랐었다.

 

민지, 천사 같은 도움

그 당시 하나님께서 천사처럼 보내주신 사람이 민지였다. 가희를 낳고 산후조리가 필요했는데, 당시 세종에서는 산후조리 인력이 부족해 지인을 조리사로 등록하고 국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침 민지가 세종에 막 내려와 자매들과 아파트를 구해 살고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던 민지가 산후조리를 도와주었다.

 

민지는 결혼하지 않은 청년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잘 훈련받아 요리와 살림이 나보다 능숙했다. 이전부터 목사님 곁에서 비서처럼 헌신하며 중보기도를 담당했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컸고, 우리 아이들과는 이미 여러가지 추억이 있었다. 하지만 민지와 나는 개인적인 대화를 깊게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다. 민지는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성격이었고, 나도 사람을 적극적으로 알아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민지를 대학생 때부터 봐왔기에 내게는 늘 어린 학생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민지는 나를 약간 어려워했던 거 같다.

 

민지는 가희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었고, 산후조리뿐 아니라 집안일까지 자주 도와주었다. 산후조리 기간이 끝난 후에도 가희에 대한 애정으로 자주 우리 집을 찾았다. 아이들도 민지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잘 따랐다. 어느새 민지는 우리에게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난 결혼 후 계속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는데, 그리고 몇명은 우리집에서 함께 살기도 했는데, 민지처럼 내 상황을 세심히 배려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남편의 헌신과 걱정

세종에서의 삶은 행복했지만, 남편은 병점과 세종을 오가는 통근으로 고생이 많았다. 그래도 그는 집에 오면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 편안해했다. “며칠은 전쟁통에 있다가 집에 오면 그제야 쉬는 기분이야”라며 웃곤 했다. 하지만 집에 올 때는 하루쯤 쓰러진 듯 잠만 잤다. 그러다보니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불만을 가질수는 없었다. 남편의 건강이 이전에 비해서 확연히 나빠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그 전까지는 항상 내 요리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간을 잘 못 맞춘다고. (나는 간을 약하게 하는 편이었는데, 남편을 약간 센 간을 좋아했다.) 그런데, 몸이 안 좋다보니 내 간이 환자식같아서 잘 맞는다고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는 말을 자주 하곤했다.

 

몸이 아프고, 교회도 떨어져 있다보니, 그제야 남편은 가족이 눈에 보인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했다. 교회 가까이에 있을때는 교회의 생존, 성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며 사역 위주의 삶을 살았었다. '그래서 병점에서는 그렇게 나 혼자 있는 느낌이 들었구나..' 나뿐만이 아니라 남편 역시도 홀로 싸우는 느낌을 가지고 살았었던 듯했다.

 

우리는 세종에 와서야 서로의 수고에 대해서 인식하고, 서로에 대해서 감사하기 시작했다.